핑크뮬리로 대박 난 야생화 농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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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뮬리로 대박 난 야생화 농부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뿌리 내리는 야생화. 누가 돌보지 않아도 자연 상태 그대로 자라는 야생화의 가치를 알아본 청년들이 있다. 우리나라 화훼시장에 국내외 야생화 신품종을 소개하며 무럭무럭 몸집을 키워가고 있는 청년 스타트업, 농업회사법인 ‘더케이야생화’다.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꽃을 피워내는 들꽃처럼, 이들은 오늘도 트럭을 타고 전국을 달린다.

휴케라, 호스타, 플라밍고셀릭스…. 이 이름들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구절초, 비비추, 꽃잔디, 패랭이꽃은 어떤가. 인위적인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 자라는 식물, 우리말로 ‘들꽃’이라 부르는 야생화다. 고향 집 담벼락에 무더기로 피어나던 들꽃이 지금은 귀한 손님 대접을 받고 있다. 새로 지은 건물이나 아파트 단지의 조경, 유명한 카페의 야외 정원까지 야생화를 활용한 조경이 인기다.

“야생화는 꽃도 예쁘지만 이파리만으로도 색감이 다양해 매력적인 식물이에요. 요즘은 꽃보다 잎을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서 야생화가 인기죠. 소득 수준이 오를수록, 선진국으로 갈수록 꽃시장은 커진다고 해요. 또 지금처럼 환경 문제가 크게 화두가 될 때도 꽃을 찾는 이들이 많아진다죠. 그런 면에서 화훼, 그중에서도 야생화 시장은 분명 승산이 있다고 봐요.”(김지인)

청년들이 모여 만든 농업회사법인 더케이야생화는 경기도 용인 남사화훼단지에 자리하고 있다. 차 한 대 겨우 지나다닐 법한 농로를 따라 허허벌판을 달리길 10여 분. 옹기종기 모인 여섯 동의 하우스와 이름 모를 들풀로 가득한 텃밭이 펼쳐졌다.

81년생 홍성현 대표와 90년생 김지인 이사가 이끄는 더케이야생화는 야생화를 사랑하는 청년들이 모여 설립한 법인이다. “부르면 달려간다”는 패기로 직접 재배뿐 아니라 지역 야생화 농가의 유통까지 책임지고 있다. 최근에는 온라인 쇼핑몰로 야생화 소매시장을 여는 등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1년 만에 20억 원대 매출을 올렸다.

“이제 2년 차 스타트업이에요. 작년 1월에 법인을 설립하고 3월 온라인 쇼핑몰에 입점했는데, 최근엔 하루 100~200건 정도 꾸준히 팔려요. 농·식품 분야는 경쟁 상대가 많아 힘들다고 하는데, 야생화 소매시장은 이제 시작 단계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죠.” (홍성현)

땅의 기운을 받고 자라난 야생화는 해가 묵을수록 더 풍성하고 화사해진다. 야생화의 강인한 생명력이다. 다년생으로 월동이 가능한 야생화는 올해 꽃이 져도 이듬해면 다시 핀다. 보통의 화훼 작물보다 키우기가 수월하면서도 생산성은 높다. 또 작은 면적에서 순환이 빠르게 이뤄지기 때문에 평당 수익률도 높은 편. 일반 고구마 농사가 평당 5만 원에서 10만 원의 수익이 난다면 야생화는 네다섯 배 수준이다. 다른 농작물에 비해 시설이나 초기 투자비용이 적어 부가가치가 높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야생화의 시장성을 먼저 알아본 건 홍성현 대표다. 그는 15년 전 액세서리 사업을 하다 실패하고 어머니의 서초 화훼농장에서 일하며 처음 야생화를 접했다.

“보통의 화훼 작물은 최종 소비자가 개인인데, 야생화는 건설 현장이에요. 아파트 단지나 빌딩 앞 조경으로 야생화를 구입하는 거죠. 조경사가 한번 구매하면 대규모로 납품이 진행되기 때문에 야생화 한 종(품목)당 최소 1000~2000개가 팔려요. 당시 야생화 10종을 키웠는데 납품만 잘되면 몇 만 개씩 팔렸어요. 사업이 되겠다 싶었죠.”(홍성현)

물론 시작부터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서울에서 자그맣게 농사를 짓다가 토지 개발로 인근 화훼시장까지 모두 문을 닫으면서 지금의 용인 남사단지로 밀려왔다. 그는 집 한 칸 없이 600평(1983㎡) 농장에서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며 차근차근 기반을 닦았다.

홍 대표는 처음부터 욕심내기보다 열 가지를 팔아 100만 원이 생기면 딱 그만큼만 더 야생화를 구매했다. 알음알음 알게 된 이웃 농장과 연계해 야생화 유통으로도 발을 넓혔다. 판로가 없는 작은 농가에 자신이 가져온 신품종 야생화를 심게 하고 이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야생화의 품종을 늘려갔다.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한 건 판교 원마을도시 녹화사업에서다. 성남시가 판교동 원마을을 관통하는 왕복 6차로에 583m 길이의 방음터널을 설치하는데, 터널 일부 구간에 지붕을 세우고 흙을 덮어 식물을 심은 것이다. 지붕 녹지에 심는 야생화를 홍성현 대표가 맡았다.

“1억 5000만 원짜리 사업인데,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주변 농가를 총동원해 야생화를 키웠는데, 공사가 지연되면서 원래 납품해야 하는 규격보다 야생화가 더 커버린 거죠. 공사가 끝나야 수금이 되는데 여유자금도 부족했고요. 그때 경험에서 대량 납품에 대한 노하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홍성현)

이후 일산과 순천, 진해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정원박람회에 초대되며 야생화 납품 기회를 얻었고 사업도 차츰 번창해갔다. 600평 비닐하우스 한 동에서 시작해 지금은 화성과 여주 등지로 확장해 1만 5000평(4만 9586m2) 부지에 2400가지 야생화를 키우고 있다.

힘없는 농부가 아닌 돈 버는 농부로

김지인 이사는 홍 대표가 운영하는 농장의 거래 고객이었다. 대학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일하던 김 이사는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회사 생활을 접고 2016년 귀농했다.

“틀에 박힌 생활이 아닌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농부의 길을 택했어요. 경기도귀농센터와 서울혁신센터, 전북귀농센터에서 귀농 교육을 받았고, 경기도농업기술원을 통해 도시농업관리사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경기도 산하기관 최초 청년이사로 재단법인 경기도농수산진흥원 비상임이사로 임명되었습니다.”(김지인)

그는 화훼연구회에서 운영하는 농업회사법인의 회계 일을 돕다가 홍 대표와 연을 맺었다.

“농업을 일종의 유통으로 봤어요. 화훼 분야는 납품 과정에서 사기가 많아요. 일단 납품이 이뤄지더라도 공사가 끝난 뒤에야 대금을 받을 수 있으니 조경업체가 떼어먹기 일쑤고요. 소규모 농장은 판로가 없어 고민이죠. 농사지어 돈 벌기가 쉽지 않아요. 그때 거래처였던 홍성현 대표가 ‘우리는 힘없는 농업인 하지 말고, 법인으로 전환해 기업처럼 제대로 운영하자’고 제안했는데, 제 뜻과 맞았어요. 회계를 전공했으니 도울 부분이 분명 있다 생각했죠.”(김지인)

김지인 이사가 힘을 보태 더케이야생화 법인을 설립하면서부터 공격적인 마케팅도 시작됐다. 온라인 쇼핑몰에 야생화를 입점시키는가 하면, 청년고용정책을 활용해 지원금을 받아 직원도 늘렸다. 또 해외에서 신품종이 나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도입해 국내 토질에 적응 가능한지 테스트하고 품종 확장에 힘썼다. 덕분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 꽃 품종을 납품할 수 있었다.

배우 정겨운・김우림 부부도 고객

“핑크뮬리가 야생화인 건 아셨나요? 우리가 핑크뮬리 1세대라 할 수 있어요. 제주도 카페 정원과 양주 나리공원, 경주 첨성대 앞에 우리 농원에서 자란 핑크뮬리를 심었어요. 핑크뮬리처럼 꽃이 아닌 잎을 보는 각종 억새류나 그라스류가 요즘 인기예요. 한번 유행을 타면 대규모로 판매되고요. 꽃이나 식물은 여성의 취향과 밀접해서 품종을 들이기 전에 먼저 어머니에게 여쭤봅니다. 마음에 들어 하시면 키우고 보는 거죠.”(홍성현)

더케이야생화의 다양한 품종은 셀럽들에게도 인기다. 유명 연예인의 집 정원이나 배우 정겨운·김우림 부부가 운영하는 영종도 카페 조경에도 이들이 키운 야생화가 심겼다.

“올해도 50여 가지 야생화 수입종 1억 원어치를 사들였어요. 버는 만큼 식물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야생화 모종이나 씨앗을 사 오더라도 1년 동안은 납품하지 않고 사계절을 다 겪을 수 있도록 테스트를 해봐요. 밭에도 심고, 화분에도 키워보며 예닐곱 가지 테스트를 거치고 나서 판매하죠. 그래야 새로운 품종을 추천할 때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김지인)

김지인 이사는 지금의 사업 확장에 만족하기보다 더 나아가 ‘사회적 농업 케어팜’을 꿈꾼다. 야생화를 기반으로 치유 농업을 펼치고 싶다는 포부다.

“식용 꽃을 주제로 한 6차 산업 화훼농장을 준비하고 있어요. 올해 농장을 오픈할 계획이고요. 이를 기반으로 사회적 농업을 키워가려 합니다. 장애인이나 몸과 마음의 치유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을 채용해 일정 구역을 주고 야생화 재배를 통해 치유의 경험을 가져가면서도 자립에도 도움을 주고 싶어요.”

홍성현 대표는 지금의 농장을 사업적으로 더욱 키울 계획이다.

“이케아식 조경 매장을 그리고 있어요. 유명 정원 작가와 협업해 다양한 방에 어울리는 조경 콘셉트를 제안하고 집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화가의 그림을 사듯, 정원 작가의 디자인을 사는 방식이죠. 막막한 정원 가꾸기를 규격화해 판매한다면 고객 입장에서는 간편하고, 판매자도 판로가 열리니 서로 윈윈이죠. 상상만으로도 재밌지 않나요?”

야생화 농부의 인생 모토는 “해보고 후회하자”다. “머리로만 판단하지 말고, 미리 좌절하지 말자,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으니 방향을 바꿔 방식을 고민하다 보면 해결점이 분명 있다”는 태도가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이들의 꿈이 화훼산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들꽃처럼 피어나길 기대해본다.